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웨인 (문단 편집) == 여담 == 터프한 이미지와 상반되게 병역을 기피한 군 [[미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징병 대상이었지만 연령과 부양가족 때문에 면제를 받았고,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자원입대를 공언했음에도 한편으론 영화 한 편만 더 찍고 입대하겠다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원입대를 연기했다.[* 기피한 가장 큰 이유로는 존 웨인이 데뷔 연차에 비해 늦게 뜬 스타라는 점에 있다.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데뷔후 [[라울 월시]] 감독의 주역을 맡았다 크게 실패하고, [[역마차(영화)]]로 각인시키기까지 13년이나 걸렸고 겨우 궤도에 올랐다 생각했더니 곧바로 전쟁이 터진 것이다. 때문에 참전했다가 죽거나 잊힐 공포감이 상당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근데 존 웨인보다 나이도 더 많고 더 늦게 데뷔한 영화인들 중 자원입대한 영화인들은 많다. 이들도 죽거나 잊힐 공포감은 엄청났다. 존 웨인만 특별 대접받을 이유는 없다.] 비슷한 나이에 자원입대한 영화배우 [[헨리 폰다]]나 [[제임스 스튜어트]][* 자고로 폰다는 민주당원, 스튜어트는 공화당원이었다. 정치 성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은 똑같은 셈. 실제로 둘은 무명 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는 등 절친이었다고 한다.]와 비교하면 [[치킨 호크|겉모습만 터프한 겁쟁이]]인 셈이라 나중에 군필인 [[존 포드]]와 영화를 찍다가 미필이라는 이유로 스탭들이 보는 앞에서 갈굼을 겪고 나서야 이 문제로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전쟁영화 촬영 때 있던 실화이다. 참고로 당시 공동 주연인 [[로버트 몽고메리]]는 2차대전 동안 함정 근무를 하며 무공 훈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이었고, 포드는 전투원이 아니다 뿐이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한 경험[*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가할 당시 포드의 연세가 이미 만 50세였다.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관 계급을 달고 '''[[OSS]]소속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노르망디, 베를린까지 누비며 준장까지 올랐다. ]이 있는 참전 용사다. 또 [[로버트 몽고메리]]는 영화 촬영 막바지 존 포드가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자 자신의 실전 경험을 요긴하게 살려 남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감독해서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기에 존 포드와 공동감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영화 사이트도 몇 군데 있다. 존 웨인이 촬영장에서 3살 연상인 몽고메리의 연기력에 지적질을 하며--[[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가르치려 드는 꼬라지를 본 존 포드가 "니가 뭘 안다고 자꾸 나대냐!"며 직접 혼냈다. 그리고 존 웨인의 [[병역기피]]가 못마땅했던 포드는 그 후 촬영 내내 존 웨인을 갈궜다. 보다 못한 몽고메리가 뜯어말려서 간신히 넘어갔다.[[https://www.imdb.com/title/tt0038160/trivia/?ref_=tt_trv_trv|#]] [[존 포드]] 감독과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s-2.2]]이었던 존 웨인은 포드 감독한테만큼은 언제나 깍듯했다고 한다. 포드는 존 웨인이 유일하게 꼼짝 못 했던 사람이었다고.[* 포드는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걸로 유명하다.] 존 포드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던 거장으로 천하의 '''[[시민 케인]]'''을 재낀 장본인이다. 그리고 당시 할리우드 유명 영화 제작자들은 모두 존 포드를 거쳐갔대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그 당시 할리우드에서 포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했다고 한다. 이런 포드의 [[승은#s-1]]이 오늘날 존 웨인을 만들었대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럼에도 존 웨인의 --지랄맞을--무례한 행동들과 과격한 [[인종차별]] 발언들은 포드 감독으로 하여금 [[인종주의자]] 논란에 시달리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단 사실을 부정하기만 해선 안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존 포드 장례식장에서 존 웨인이 추도문을 읊었다.[[https://outsider.com/entertainment/john-wayne-spoke-frequent-collaborator-john-ford-day-mentors-death-all-about-heartbreaking-conversation/|#]] 반면 존 웨인의 장례식은 추도문 하나 읊어줄 동료 배우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비공개 가족장이었다. 다만 존 웨인의 3번째 부인 필라 팔레트(Pilar Pallete)는 이혼만 안 했다 뿐이지 1973년부터 존 웨인과 별거로 사실상 남남이었는데 일단 단역배우였고, 장례식장엔 참석했으므로 동료 배우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굳이 따지면 아니지만 자기 딴에 쌓아온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장례식인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살이 많이 덧붙여진 존 웨인 [[냉동인간]]설은 일단 사망 직후 나온 부고엔 없다.[[https://www.latimes.com/local/obituaries/archives/la-me-john-wayne-19790612-story.html|#]] 존 웨인 스스로만 라이벌로 의식한 [[게리 쿠퍼]][* 정작 게리 쿠퍼는 존 웨인을 그닥 의식하지도 않았다. 대신 쿠퍼는 동갑내기 [[클라크 게이블]]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둘 다 185cm가 넘는 장신, 굉장한 미남 등등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실제로 하나의 배역을 두고 경쟁도 많이 했다고.]의 장례식이 [[라이프(잡지)]]의 표현대로 [[https://www.life.com/history/saying-farewell-to-a-strong-silent-star-the-funeral-of-gary-cooper/|왕족의 장례식]]이라 평가받은 것과 대조적. [[캐서린 헵번]], [[존 레논]], [[스파이크 리]], [[클라크 게이블]], [[프랭크 시나트라]]는 공개적으로 존 웨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p0xhbomExZs|출처]] 존 웨인은 후배 배우 [[진 해크먼]]을 [[https://doyouremember.com/169268/john-wayne-thought-gene-hackman-worst-actor|매우 싫어했다.]] 또 [[로버트 듀발]]이 촬영장에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며 [[https://www.newsbreak.com/news/2477835772206-john-wayne-and-robert-duvall-nearly-came-to-blows-filming-a-classic-western|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치킨 호크]]도 못되고 걍 [[싸움닭]](...)-- 그 외에 영화 <혼도(Hondo)>(1953) 촬영 당시 10살짜리 아역배우 리 에이커(Lee Aaker)가 연기를 못한다며 현장에서 [[https://www.cheatsheet.com/entertainment/john-wayne-bullied-child-actor-took-hondo-directing-duties.html/|학대했던 적]]도 있는 등 존 웨인이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1976년 필 도너휴와의 인터뷰에서 존 웨인 스스로 선정한 영화 인생 최고작은 모두 3작품으로 [[역마차(영화)|역마차]], 히타리(1962)[* [[하워드 혹스]] 감독작.],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https://screenrant.com/john-wayne-favorite-films-stagecoach-quiet-man/|#]] 또 1977년 'The People's Almanac'이 보낸 설문조사에 보낸 답장에서 존 웨인이 꼽은 영화 역사상 최고 걸작은 모두 5작품으로 A Man for All Seasons(196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962), [[수색자]], [[말 없는 사나이]] 순이다.[[https://screenrant.com/john-wayne-favorite-films-searchers/|#]] 또 [[스펜서 트레이시]],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헵번]], [[로런스 올리비에]], [[라이오넬 배리모어]] 순으로 역대 최고의 배우를 선택했다.[[https://starsandletters.blogspot.com/2015/07/john-waynes-personal-favs.html|#]] [[스파게티 웨스턴]]에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피자]]나 먹으려고 이탈리아로 갔냐?"라고 했다. 하지만 꽤 당찬 성격인 이스트우드는 되려 "선배님은 그럼 늘 [[햄버거]]만 먹습니까?"라면서 반격했고 웨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러났다고 한다. 월간 키노에서 할리우드 스타들 대사로 나온 바 있다. 그밖에도 나중에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평원의 무법자]]를 미국이 무슨 지옥같은 서부 시대를 거쳤다고 왜곡했다며 흥분하여 악평한 것도 유명하다. 이스트우드도 열성 공화당원이지만, 진보적인 면도 크던 터에 "어디건 자기 나라가 가장 멋지고 위대하게 포장하기 마련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외면하고 죽어라 못 본 척하고요."라는 말로 까면서 선배의 발악적인 비난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열성 공화당원인 것과는 별개로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매카시즘]]의 찬성파로 까이기도 했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도 빚었다. 이로 인하여 [[퍼블릭 에너미]]의 대표곡인 Fight The Power에서 대놓고 까인다.[* 무려 '''Motherfuck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극딜했다. 함께 극딜당한 대상은 [[엘비스 프레슬리]]인데, 그는 흑인음악을 따와 백인음악으로 빌려와서 록 음악 자체를 백인의 전유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극딜당한다.] 1971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흑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교육을 받을 때까지 [[백인우월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광활한 이 땅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부당하게 취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고 이 땅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데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은 이기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헨리 폰다]]한테 뺨 맞을 소리하고 있네-- 이외에도 1973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말런 브랜도]]가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하고, 할리우드의 [[아메리카 원주민]] 차별을 비판하며, 대리자인 서신 리틀페더를 통해 수상식장에서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에는, 존 웨인은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수상식장에 올라가 직접 리틀페더를 끌어내리려 하기도 했다가 진행요원 6명에게 본인이 들려서 내려왔다.(...) [[쿠 클럭스 클랜|KKK]] 소속이거나 거기 간부와 잘 안다는 소문도 많았는데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래도 [[엘리아 카잔]]처럼[* 카잔이 까이는 것은 전향 때문이 아니라 [[무고죄]] 때문이다. [[매카시즘]] 문서에도 보이듯이 실제로 밀고된 사람중에 공산주의에 깊이 관여했거나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카잔은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들에게 [[누명|가짜 혐의]]를 덧씌워 팔아넘긴 것이다.] 위증이나 무고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매카시즘으로 심하게 비난받지는 않지만,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자적 행보를 자주 보여왔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소수인종 배우들과 인종차별문제를 비판하는 배우들이 매우 싫어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여기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적극적으로 모병 운동을 펼치기도 해서 [[히피]] 세대가 주축이 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쪽에서도 백안시 당했다. 심지어 [[존 포드]]는 좋아하더라도 존 웨인은 싫어한다는 식의 영화인도 많은 편. 그래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로 인한 인종차별 재조명 중 존 웨인 동상 철거 요구가 등장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707985?sid=104|#]] 이에 아들이 반박하는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715206?sid=104|#]] 웨인은 심지어 자신과 데이트를 한 여자들을 영화에 기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고 세금 [[탈세]] 혐의도 있다든지 여러 모로 안 좋은 일로 욕먹을 짓도 좀 저지른 바 있다. 성격도 좀 욱하는 면이 커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가지고 탈세라든지 여러 모로 논란이 큰 후배 [[프랭크 시나트라]]와 사이가 안 좋았다. 한번은 웨인이 머무른 호텔에 바로 시나트라 일행이 머물며 신나라 잔치를 하는데 웨인이 잠 좀 자자고 짜증내자 시나트라는 경호원을 내보내 내쫓았다. 그러자 분노한 웨인은 의자를 갖고 와 그 경호원을 내리쳐 기절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의자로 맞고 싶은 개색히 있냐고 일갈하는 통에 시나트라는 깨깽...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오렌지 카운티 공항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존 웨인 공항으로 불린다. 말년을 보낸 곳이 공항 근처의 뉴포트비치였기 때문이다. 중국계로 미국에서 활동중인 [[조이럭 클럽]], 슬램댄스의 영화감독 웨인 왕은 바로 존 웨인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정작 자신은 "존 웨인 영화 싫어하는데..."라며 쓴 웃음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를 유난히 싫어했다. 'Lust For LIfe(열정의 랩소디,감독-빈센트 미넬리. 1956년작)'에서 영화에서 고흐 역을 했던 후배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게 "그딴 미치광이 역은 왜 했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정작 더글러스는 이 고흐 역을 위해서 고흐에 대한 책자도 엄청 읽어보고 연구도 하면서 연기하여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니 무척 기분나빠했던 건 물론이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고갱]]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까지 받은 배우이자 실제 화가이기도 한 [[앤서니 퀸]]은 이 말을 듣고 치를 떨었고 살아 생전 존 웨인을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대체 역사 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잠깐 언급만 된다...대체 역사 세계에서 2차 멕시코 전쟁의 영웅이자 현직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문배우로 북부에서 활약 중. 본편에서는 실명으로 언급만 돼서 자세한 사항을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위에서도 언급됐다시피 그의 사망 원인은 [[암]]이다. 영화 '징기스칸'을 촬영한 무대였던 미국 황무지/사막지대가 당시 미군이 [[핵]]실험을 한 장소들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에는 잔류방사능에 의한 후유증이나 발암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그러나 존 웨인 자신은 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고 그저 매일 담배 '''6갑'''을 피워서 [[폐암]]에 걸렸다고 믿었다.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그렇지만 그는 원발 폐암은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순조롭게 극복했고 사인이 폐암도 아니었다. '징기스칸' 찰영 당시 같이 있었던 스태프 220여명 중 절반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된 후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꽤 유명한 [[http://t1.daumcdn.net/cafeattach/EVs/f74f1959d9869ccf2c7d394716d817d3a1ae33a4|일화]]이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선 존 웨인의 무덤이 비석만 있는 빈 무덤인 상태이고 워싱턴 DC 지하벙커에 냉동인간 상태인 존 웨인이 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를 주제로 방송을 한적이 있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1976년, 존 웨인은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는데, 바로 '''무려 4000톤짜리 군함을 맨 몸으로 민 것이다.''' 정확히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초도함인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이하 '페리 호'라 지칭)의 진수식이 1976년 9월 25일 한창 진행중에 있었는데, 하필 쭉 밀려 물에 풍덩 빠져야 할 페리 호가 조선대(Slip-way)에서 걸려 멈춰 서버린 것(...). 미 해군의 하늘을 책임질 최신예 방공 호위함이, 그것도 하필 초도함이 진수식에서 걸리게 된 거다. [[미신]]과 [[징크스]]에 민감한 뱃사람들로 가득한 해군의 특성상 이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고, 몇몇은 당시 '배가 물을 거부한다' 내지는 '물이 이 배를 거부한다'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수식에 참관 중이던 존 웨인이 직접 나서서 밀자, 배는 잘만 밀려 바다에 무사히 떴던 것이다. 당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존 웨인이 직접 깬 것.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페리 호는 1997년 2월 20일 퇴역될 때까지 큰 사건 없이 잘 운용되었고, 기타 자매함들도 [[USS 스타크 피격 사건|여러 사건사고들에]] [[이란항공 655편 격추사건|휘말렸을지언정]] 전량 퇴역이 결정될 때까지 1대도 격침되지 않은 채 적어도 제 밥값은 잘 해냈다. 그리고 일부는 현재도 미국의 몇몇 우방국들의 바다를 잘 지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